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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직장기 (出職場記)

자유작가 2019. 12. 16. 22:41

나는 평생을 머무르리라 마음먹었던 삶의 터전에서 퇴직을 결심했다.

 

 

그곳은 풍요로운 미래와 끊임없는 자기발전이 약속된 명예로운 땅이었지만,

 

입사와 동시에 가입되는 ‘기대한 바’라는 이름의 채무를 갚지 못하면 누구든 유통기한이 지난 생선 머리와 같은 신세를 면할 수 없는 곳이었다.

 

 

형태도 색도 없는 무형의 신종 빚을 관리하는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어서,

 

꿈과 재능을 분납하고 젊음과 건강까지 끌어들여 다달이 메우고자 노력했지만 복리로 불어나는 이자는 야속하게도 눈덩이처럼 커져가기만 했다.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깨어있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무언의 압통을 꾸역꾸역 삼켜가며 버텨내길 수 년째.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버린 나는 결국 스스로 ‘이달의 사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입사할때 거쳤던 첩첩산중의 선발과정이 무색하게 퇴직절차는 놀라울정도로 신속하고 매끄럽게 진행되었고

 

한때는 동료라고 불리웠던 나의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정해진 절차에 맞춰 예의바른 작별인사를 건넨 뒤

 

다음달의 사원으로 선정되어서는 안되는 각자의 사연에 따라 규칙적인 걸음으로 네모난 모니터앞으로 복귀했다.

 

 

첫출근때부터 어딘가 영 맘에 들지 않았던 삐걱거리고 무겁기만한 현관문을 앙상해진 팔목으로 겨우 밀고 나오니 바깥은 어느새 혹독한 겨울이 한창이었다.

 

 

폐부를 구석구석 찔러대는 찬 공기와 얼어붙을듯한 바람이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련만, 이상스럽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되려 따뜻하고 포근한 봄 바람 사이를 거니는듯 한없이 자유로웠다.

 

 

불꺼진 방안에 도착해 바리바리 싸 들고온 짐 더미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벼락맞은 통나무 쓰러지듯 털-썩 침대에 눕고나니

 

제대로 쉬어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뜨겁고 거친 숨이 깊은 내면에서부터 울컥 몰아나왔다.

 

 

 

‘하--’

 

 

 

‘이제 어떻게 하지?’

 

 

구름낀것같이 늘 멍하기만 하던 머리를 좌-우로 휘젓고 한동안 고요한 침묵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쉬고 싶다’는 생각과 ‘새로운 나를 찾고 싶다’는 마음이 텅 빈 허공에 떠올랐다.

 

 

‘그래. 쉬어보자. 쉬기 싫을때까지 쉬어보자. 새로운 것이 아닌 어쩌면 알고도 평생을 외면하고 살았을 진짜 나의 모습을 되찾아보자.’

 

 

안에서부터 밖으로, 작지만 강력하게,

 

꾸준히 나를 두드려오던 내 안의 소리

 

모든걸 비우고 내려놓았을때만이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가장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

 

 

그 꽉찬 돌멩이같은 소리 하나를 빈 주먹에 가득 움켜쥐고서

 

 

그렇게 나의 찬란한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